애엄마에게 이런 날은 미리 날을 잡고, 남편 당직 스케쥴도 피해놓고 해서 어쩌다 한 번 만들어놓는 이벤트다.
먹고 마시며 이야기하다보니 울아부지 이야기가 나왔다.
시골 깡촌에서 8남매중 여섯째로 태어나 갖은 고생하시고.......blahblah하다보니 끝은 자랑이 되었네?
서울사람 둘 앞에서 나는 또 자랑스러워하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시골 큰집이 있다는 것, 방학때는 대부분의 기간동안, 방학 아닌때는 격주로 시골다니며 흙밟고 시골친구들이랑 뛰어놀고 한 것들. 아부지가 내게 해준 것중 딴 건 하나도 안 남고 저것들만 남았다. 서울 사람들이 루틴으로 했다는 플룻보다 저걸 더 자랑스럽게 여기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어쩌면 아부지가 사교육 안 시켜준게, 그래서 주말마다 큰집 다닐 수 있었던 게 내 멘탈에 훨씬 더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집에 와 씻던 중, 할아버지 생각이 났다.
할아버지 상 치를때가 또 내 인생에서 가장 자랑스러웠던 순간 중 하나였다.
시골 큰집에서 운명하신 후 병원에 (당연스럽게) 모시지도 않고 집에서 상을 치뤘다. 그 동네에서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상을 치른다는게 병원 장례식장에서 하는것만도 보통일은 아닌데, 사실 집에서 치르자면 손님들 먹이고 자리펴서 모시는 게 예삿일이 아니다. 근데 그걸 어떻게 하느냐?
다 동네 사람들이 모두 나서서 해준다. 음식 만들기도, 음식 나르기도, 그 외 모든것도. 마을회관에서 음식을 만들고 나르고..
당시엔 첫직장 S사를 다니고 있었는데, 일하다가 소식을 듣고 바로 뛰쳐나가면서 부장님께는 간단히 말씀을 드렸다.
할아버지 상이었기에 당연히 부서원들 안 오셔도 되고, 그냥 간단한 상으로 생각하고 시골집으로 갔다.
한데 나중에 부장님이 친히 오시겠다고, 전화를 주시는게 아닌가.
그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던 모과장님과 함께 온다고 하여 부득불 말렸으나 굳이 오신다 하여 실패..
가까운 상도 아니고 할아버지 상인데 서울에서 김천, 그것도 택시도 안다니고 버스도 종점 넘어 있는 제일 깡촌까지 오신다니 부담이 됐다. 안 오셔도 될 껄 괜히 오신다고..
어쨌거나 부장님과 과장님은 김천역에 도착하시어 사촌오빠와 차를 가지고 나가 모시고 집으로 왔다.
상갓집에 도착했을 때, 그때 그 부장님의 반응이 생생하다.
경이감, 그리고 반가움을 그지없이 드러낸 부장님. 아직도 이렇게 상을 치르는 곳이 있다냐.
할아버지가 운명하시자 건넛마을 어디선가 누군가 등장하시어 할아버지 염은 어떻게 하고, 수의는 예전에 미리 마련해두셨을테니 그걸 입으면 될테고..일사천리로 진행을 시키신다. 아, 부산큰아버지께서 모 상조단체에 들어두신 게 있다하여 그럼 부산까지 연락을 해서 그 benefit을 입느냐 아님 여기서 local로 그냥 이용하느냐 어쩌네 마네 옥신각신하다가 결국 local을 이용. 그때 상조회사의 존재를 처음 알았고 덧없음도 알았다.
하여간에 수의가 8남매 이하 식구들에게 분배됐다.
나는 병원 장례식장 등에서 보던 반들반들한 까만 상복 대신 흰치마저고리를 입었다. 일하기 딱 좋은, 막입어도 되는 옷이었다.
어른들은 굴건제복을 하셨는데 삼베로 된 옷에 머리에는 긴 모자(굴건), 손에는 지팡이, 옷도 뭐 부대품목이 많은 복잡한 옷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와...하는 옷. 그걸 입으시고 이제 몇날며칠 곡을 하시는 거다.
곡을 한다는게 대충 하는 건줄 알았는데 진짜 손님이 올때마다 "아이고 아이고"를 하신다. 건성으로 하지 않고 찐하게 아이고오..
당연히 나중에는 목이 쉬어서 제대로 나오질 않는데 그게 그런대로 또 참 구성지다.
정신없이 일하느라 머리는 풀어헤쳐지고 막옷을 입고 부장님을 맞으러 갔으니 부장님과 과장님은 의아한 표정, 그러다 상갓집에 오니 여자과장님은 절반은 넋이 빠지시고.
부장님은 고향에서 살 때나 보고 처음 본다며 참 좋아하셨다. 상집에 와서 그리 좋아하시다니...
심지어는 오는 길에 길 곳곳에서 들린 개구리 소리도 너무 반갑다며, 워크샵 여기서 하자라는 제안도 하셨다.
그때 내가 느낀 프라이드는 이루 말할수가 없다..
저 기억을 다시 떠올리며 샤워를 하다 마지막에 든 생각이,
아이폰이 있었다면 그때 그 기억들, 사진 한 컷으로라도 남겨놓았을텐데..참 아깝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이제는 아마 그렇게 상 치르질 못할 거다.
상갓집이었지만 참 신명나게 일했던, 잔치같기도 했던 그 여름날들의 기억.
우리 아들도 사교육 돌리지 말고 그 시간과 돈으로 여행다녀야지. 다시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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